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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어느 여름날, 러시아 여행의 추억 - 02. 준비여행/2016 러시아 여행 2024. 8. 7. 02:40반응형
러시아 여행이라는 오직 나만을 위한, 그리고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가 하나 생겼다. 그러자 답답했던 내 마음에 잠시나마 산들산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K와의 의논 후, 우리는 돌아오는 여름방학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널리 알려진 환상과는 달리 한겨울의 러시아는 가까운 곳조차 돌아다니기 힘들다는 후기들이 그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숨 막히는 이 현실을 떠나고 싶었다.
대학 친구였던 K와 자주 만날 겸, 나는 한 학기만 더 버티면서 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후일을 위해서 최대한 돈을 모았다.
이미 이런저런 여행 경험이 많았던 K 덕분에 이후 우리의 준비 과정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서툴지만 확실하게 계획을 짜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나갔다.
여권 신청
여행이 결정되자 나는 부랴부랴 여권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간만에 멋을 내어 사진을 찍고, 관공서를 방문해 서류를 작성했다. 신청 절차 완료 후 일주일이 조금 지나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여권을 손에 쥐었다. 참고로 2014년부터 한국과 러시아 간에 비자 면제가 실시되었다. 그래서 60일 이내의 러시아 방문 시, 우리와 같은 단순 여행객들은 따로 비자를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
여행 기간과 경로
여름 방학을 이용해 다녀오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나와 K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러시아를 넘어 서유럽 끝까지 가려던 처음의 목표는 수정해야 했다. 차선책으로 우리는 러시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대략 9,900km의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 서적과 인터넷상의 후기들을 참고해 우리가 결정했던 최종 여행 기간과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출국 → 블라디보스토크(1박 2일) → 시베리아 횡단철도 9,288km(7박 8일) → 모스크바(3박 4일) → 상트페테르부르크(3박 4일) → 귀국 (총 16일)
항공편 예약
여권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예약이 필요한 여러 절차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우리를 러시아로 보내줄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해 줄 항공편 예약이 가장 첫 번째 순서였다. 모든 항공편은 러시아 항공사를 이용하기로 했다. 2016년 당시 원-루블의 환율도 영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항공사들의 이용 가격이 두배 이상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인천에서 동해상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러시아 여객기는 한국 여객기에 비해서 비행시간이 30분 정도 짧았다.
인천국제공항(ICN) → 블라디보스토크(VVO) 직항 노선 : 아에로플로뜨 산하 아브로라 항공, 실제 비행시간 약 1시간 40분, 1인당 약 15만 원
상트페테르부르크(LED) → 노보시비르스크(OVB) → 인천국제공항(ICN) 환승 노선 : S7 항공, 실제 비행시간 약 10시간, 1인당 약 40만 원
열차편 예약
OTA(Online Travel Agency)를 이용해 쉽게 예약한 항공편이나 숙소와는 달리, 열차편은 러시아 철도공사(РЖД, RZD) 웹사이트에서 직접 예매를 했다. 웹사이트에 영어 번역 지원기능이 있긴 했지만 느린 응답 속도와 모스크바 시간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조금 버벅거렸다. E-Ticket으로 예매하면 복사 용지에 바로 승차권을 출력할 수 있었다. 다만 나와 K는 여행 기념물을 남기기 위해 추후 현장에서 실물 표를 발권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장거리 열차는 엑스쁘레스(Экспресс, Express)로 분류된다. 예매 혹은 탑승 시에 단거리 통근 열차인 엘렉뜨리치까(Электричка, Elektrichka)와는 꼭 구분해야 한다.
7~8일 동안 밤낮없이 달리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각 객차는 대부분 침대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침대칸의 수와 시설 차이에 따라 객차 및 객실의 등급이 구분된다.
륙스(Люкс, 1st Class Sleeping Compartment) : 1등 침대칸, 한 객차가 8개의 2인실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방에는 2개의 1층 침대가 있다.
꾸뻬(Купе, 2nd Class Sleeping Compartment) : 2등 침대칸, 한 객차가 9개의 4인실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방에는 2쌍의 2층 침대가 있다.
쁠라쯔까르따(Плацкарта, 3rd Class Open Sleeping) : 3등 침대칸, 한 객차가 위아래 54개의 침대로 구성되어 있다. 구분을 위한 칸막이가 있기는 하지만, 화장실과 세면실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항상 개방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1등 칸이나 2등 칸을 타면 보다 쾌적하게 여행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3등 칸을 선택했다. 승차권의 가격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인당 약 15만 원 정도로 매우 저렴했다. 물론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나와 K는 러시아 사람들이 매우 궁금했고 가까이에서 부대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 덕분에 우리는 열차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숙소 예약
OTA를 통해 숙소를 선택할 때, 나와 K는 근처에 큰 지하철역이 있는지를 지도에서 우선 살펴보았다. 지하철은 생면부지의 말도 통하지 않는 도시에서 가장 저렴하고, 편하고, 정확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지하철이 없는 작은 도시이고 그곳에서 하룻밤만 묵을 예정이었기에, 우리는 고민 없이 가격이 저렴하고 후기가 좋은 게스트하우스를 숙소로 선택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 두 대도시에 있는 수많은 숙소들 중에서는 근처에 큰 지하철역이 있고 후기가 좋은 호텔을 찾아서 예약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묵었던 슈퍼스타 게스트하우스 - https://maps.app.goo.gl/Vpt9t6Wet8Duyd7D9
모스크바에서 묵었던 아르바트 하우스 호텔 - https://maps.app.goo.gl/SVJ6kLyXnZ57KWe17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묵었던 이딜리야 인 호텔 - https://maps.app.goo.gl/sTBFdTBQKcbLUN35A
환전
러시아 현지에서 사용할 루블화(₽, RUB)도 미리 환전했다. 먼저 신한은행 앱을 통해서 편하게 환전을 신청했다. 그러나 현금을 수령할 때는 멀리 서울에 있는 은행 본점까지 내가 직접 가야만 했다. 아마도 한국에서는 루블화가 주요 외환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은행에서만 취급했던 것 같다.
운이 좋게도, 내가 환전을 했던 2016년 상반기에는 루블화의 가치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당시 1 루블당 15원 정도의 환율로 1인당 15,000 루블(약 250,000원)을 마련했다. 이 정도 금액만으로 보름 동안 나와 K는 러시아 현지에서 부족함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근처에 별다른 식당이 없을 때만 먹었던 빅맥의 가격이 130 루블 정도(약 2,000원~2,500원)로 한국에 비해 식비가 무척 저렴했다.
기타
우리는 대학생 신분도 최대한 여행에 이용했다. 유명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방문 시, 매표소에서 국제 학생증(ISIC, International Student Identity Card)을 제시하면 입장권 할인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K가 알아냈다. 그 즉시 우리는 국제 학생증을 신청했다. 나중에 국제 학생증을 이용해서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따쉬 박물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Hermitage Museum)을 무료로 견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러시아어 기초 수업을 찾아서 수강했다. 최소한 단어를 읽고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하고 싶었고 그것이 러시아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 학기만큼은 전공 수업은 내팽개치고 러시아어를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나의 기대치를 훨씬 넘어서, 이 약간의 공부가 우리의 러시아 여행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현지에서 스마트폰 데이터를 사용하기 위해 심 카드(SIM)도 미리 알아보았다. 보통 여행객들이 러시아에 도착하면 공항이나 시내 통신사 대리점에서 기간제 심 카드를 구입하는 모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심 카드를 구입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는 후기도 있었다. 우리도 시내 통신사 대리점에 방문해서 심 카드를 구매하기로 했다.
K 덕분에 깔끔하게 여행 준비를 마치고도 나는 괜스레 불안했다. 난생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이기도 했거니와, 앞서 말한 대로 여행을 다녀온 뒤의 일도 걱정이 되었다. 타고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 사소한 성공 한번 이루지 못한 채 나는 인생의 불확실함에 대해 막연한 공포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쥐어짜 낸 용기로 나는 불안을 숨긴 채, 그렇게 청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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